지난달 24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양자기술연구단 연구실은 실내조명이 모두 꺼져 있었고, 카메라 렌즈처럼 생긴 기기들이 복잡한 구조로 설치되어 있었다. 빛을 발생시키고 그 경로를 거울로 제어해 양자 신호를 만드는 장비였다. 온도를 극저온으로 낮추는 초전도(超傳導) 방식의 IBM, 구글 양자컴퓨터와 달리 상온에서 구동하는 양자컴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상온 양자컴퓨터는 거대한 냉각기가 필요 없어 부피를 대폭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상욱 KIST 양자기술연구단장은 “과거에 커다란 진공관이 자그마한 트랜지스터 회로로 발전한 것처럼 양자컴퓨터를 손톱만 한 작은 칩으로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며 “이를 위한 생산 시설을 구축 중”이라고 했다.
빅테크(거대 기술 기업)의 양자컴퓨터와 차별화한 양자컴을 독자 기술로 개발하려는 한국 정부와 기업, 연구기관의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미국의 양자컴퓨터 기술 수준을 100점이라고 할 때 한국은 아직 2.3점에 불과하다. 양자컴퓨터 기술 선도국보다 한참 뒤처져 있는 상황이지만, 자체 기술을 확보해 독자적으로 양자컴을 개발해 상용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양자 관련 예산을 지난해 950억원에서 올해 1300억원, 내년 2000억원으로 매년 큰 폭으로 늘리며 지원을 확대한다.
◇1000큐비트급 양자컴 개발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은 현재 20큐비트(양자컴퓨터 연산 단위) 성능의 양자컴퓨터를 개발했다. 지금은 실험용 수준이지만 올해 클라우드(가상 서버) 서비스를 통해 연구자들에게 개방하고, 2026년에는 50큐비트급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상온에서 작동하는 광자(光子) 기반 8큐비트 집적회로 칩을 개발했다. ETRI는 올해 중 16큐비트 칩 개발에 도전하고, 이후 32큐비트까지 성능을 확장할 계획이다. ETRI 윤천주 양자기술연구본부장은 “앞으로 5년 안에 양자컴 클라우드 서비스를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이용호 표준과학연구원 양자연구단장은 “양자컴퓨터는 추후 일종의 전략물자가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후발 주자도 안보 측면에서 자체 국산 기술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양자컴퓨터 생태계를 확장하기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 4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는 양자 시대 종합 전략인 ‘퀀텀 이니셔티브’가 통과됐다. 양자컴퓨터의 핵심이 되는 양자 프로세서(QPU), 소프트웨어 등 개발을 목표로 연구·개발(R&D) 투자를 확대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2035년까지 양자 핵심 인력을 2500명, 양자 활용·공급 기업을 1200곳 확보해 기술 수준을 최선도국의 85%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과기정통부는 2025년부터 2032년까지 초전도·중성원자 방식의 1000큐비트급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고 이를 활용한 응용 성과를 내놓을 계획이다. 이를 뒷받침할 양자인터넷과 양자센서도 개발하는 등 8년간 약 7300억원 예산을 투입한다.
◇“양자 인재 확보 필요”
전문가들은 한국이 양자컴퓨터 응용 분야에서는 경쟁력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IBM의 백한희 박사는 “양자컴퓨터 소프트웨어나 응용 분야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여서 한국이 도전해도 늦지 않다”며 “부가가치가 매우 큰 분야”라고 말했다. 양자컴퓨터 스타트업 아이온큐를 창업한 김정상 듀크대 교수는 “추격과 추월의 원동력을 마련할 기회는 충분히 있다”며 “양자컴퓨터 연구·산업 분야에서 앞서갈 수 있는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인재 양성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양자컴퓨터 업계에 따르면 기업에서 양자 전문가를 채용하려고 해도 구하기 어려워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한다. 김 교수는 “모든 성장 동력은 최고의 인재에서 나온다”며 “중견 연구 개발 인력을 적극 지원하고, 해외 협력 기회를 확대해 독창적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백 박사도 “IBM은 한국, 미국, 일본에서 향후 10년간 최대 4만 명의 학생을 교육할 계획”이라며 “정부도 양자 정보 과학자 양성에 적극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유지한 기자 jhyo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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